칼럼의 주제
칼럼을 쓸 때 이번 주는 무얼 가지고 쓰나 생각합니다. 보통은 지난 한 주간 우리의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나 주제, 혹은 제가 개인적으로 집중해서 생각했던 것들을 선택합니다. 이유는 그래야 쓸 때 비교적 쉽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도 일들이 많았습니다. 한림운에서는 노벨상 수상자들을 발표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앤 카슨은 여러 모로 영감을 줍니다. 그의 시학과 작품들 뿐만 아니라 파킨슨으로 투병하는 그의 삶도 그렇습니다. 작년에 이어 노벨 화학상을 2년 연속으로 받은 일본이 부럽습니다. 한편 노벨평화상는 간절히 원했던 트럼프 대통령 대신 국제사법재판소 임시재판관인 나비 필라이가 선정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노벨생리의학상인데 광유전학을 개척한 세 명의 과학자들이 수상했습니다. 광유전학은 인간의 의식과 감정을 부분을 빛으로 신경세포에 영향을 주어 컨트롤하는 분야입니다.
이 외에도 미국 장기 국채 금리가 상승한 것은 많은 경제전문가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분석과 예측을 쏟아내게 했는데 대부분은 ‘위기‘라는 진단이었습니다. 지뢰 문제로 북한과 남한 사이의 MDL(군사분계선)에 관한 논쟁이 있었고 3분기 영업이익이 100조를 돌파한 삼성을 두고 삼성전자의 주가와의 상관관계, 강남을 제외한 서울 외곽에서 꾸준히 오르는 아파트 시세를 두고 ’평탄화‘라고 말하는 대통령의 시각과 매우 좋지 않은 징조라고 분석하는 전문가들의 진단도 화두였습니다.
머리가 아프죠? 이외에도 끝을 모르는 러우전쟁, 확전되고 있는 이란전쟁, 러시아 이르쿠츠크 페스트 연구소에서 시작된 판데믹의 공포, 태평양의 수심 오도 10도씨 상승으로 인해 예견되는 올해 겨울 슈퍼 엘니뇨까지. 제가 책상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만 써도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성경을 근거로 자기 중심성을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이 될 것입니다.
이런 큰 문제들 외에도 우리는 각자 개인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은 나만 해당되는 자신의 문제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내 뜻대로 안되는 자녀교육이, 어떤 사람에게는 부부 사이의 다툼이, 어떤 이에게는 질병이나 외로움이...
앞서 말한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의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가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자기 중심성은 이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인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이런 현상을 ‘갇힘’이라고 말합니다. 흑암은 이렇듯 갇히는 것이 그 본성이요, 갇혀 있는 포로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는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빚을 갚을 수 있는 돈이나, 외로움을 없애주는 좋은 친구가 아닙니다. 전쟁과 판데믹의 위협이 닿지 않은 안전한 곳이나 140년으로 수명이 예상되는 1970년 이후 출생자들의 노후를 넉넉하게 대비할 수 있는 3600만원x25의 현금성자산이 아닙니다. 그 해결책은 영원하지 않은 것들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세속화에 물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좋아하고 심지어 외운다고 하더라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셀 수 없는 많은 것이 필요하며 ‘돈’이 그 모든 문제를 해결 해 줄 수 있는 전능한 위치에 있는 세상 속에서 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고전 13:13을 진리이면서 참으로 현실적인 말씀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세포보다 더 작은 미시의 영역에서 우리가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이를 수 없는 거시의 영역까지 다스리시면서 신실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을 더하여 주시리라,’ ‘즉 적은 무리여 무서워 하지 말라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말씀을 이루어 주실 수 있습니다.
끝으로 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어디에’ 그리고 ’얼마나’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