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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성과 자유의지

엄태우 목사
8월 17일
3분 분량

자아自我.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죄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테베시의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의 원인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오이디푸스 자신이었던 것처럼. 아마 프로이트가 21세기에 살았더라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문제의 원인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있는 모순적 상황’이라고 정의내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아가 죄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 성격을 가지고 비교할 때 그것은 꼭 하나님의 신적 계시가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전한 이성으로도 발견할 수 있는 진리다. 물론 ‘죄의 본질’이라고 말하기까지는 말씀의 빛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의 원인이 타인과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에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도 사람이 충분히 이를 수 있다. ‘율법’의 문제다. 


동시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아가 중립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아’ 자체가 죄이거나 악이라는 말이 아니란 뜻이다. ‘자아’가 모든 판단의 중심이 되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죄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이런 문제는 내 뜻 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타인을 비방하느냐, 자신을 성찰하느냐의 선택과 반응의 일로 자신의 내면의 깊은 곳에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건강한 자아에 대한 사랑은 중요하다. 나는 이것을 종종 ‘fair’라고 말한다. 한글로 ‘공정하다’라고 말해도 되는 것을 일부러 영어로 표현하는 이유는 외래어처럼 쓰이는 ‘fair play’ 때문이다.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한다. 6학년과 1학년이 달리기 경주를 하면 이것은 fair play가 아니다. 이런 것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작부터 기울었기 때문에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각지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희생’을 강조한다. 희생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틀리거나 어리석은 행동도 희생이라는 명분을 붙이면 좋아 보인다. 지금에 와서 인생을 돌아보니 감히 ‘희생’이란 말을 쉽게 언급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배왔다.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이란 말 뒤에 자신의 미숙함과 비겁함을 감추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바울사도도 ‘나는 너희를 위해 희생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나는 희생보다 자신이 행복한 것을 선택하는 편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희생은 하나님처럼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존재만 가능하다. 인간처럼 불완전하고 연약한 존재가 희생한다는 것은 사실 상대방에게 보내는 비용청구서요, 앞서 말한 도피요, 숨는 행위이다. 그래서 fair하게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힘든 것은 힘들다고 말하고, 필요하면 화도 내야 한다. 싫은 것은 왜 싫은지 말하고 싫은 것을 요구하는 상대에게 무례하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자아’는 중립적이다. 성경의 많은 계명들 중 대강령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개정판에서는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타인을 사랑할 자격도 힘도 없다. 그러나 죄는 이런 건강한 자아에 대한 사랑을 방해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하기 보다 자신을 힘들게 하고 후회할만한 일들을 한다. 


fair한 것은 부단한 성찰과 훈련으로 다져지는 것이다. 미숙한 사람은 fair한 생각을 할 수 없다. 타인을 의존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가치를 배우지 못하면 평생을 살아도 fair할 수 없다. 지나치게 희생만 하거나 타인을 과하게 이용하거나 둘 사이를 오고 간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을 모른다는 점이다. 평생을 살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없다. 


내가 fair하다고 말한 자아에 대한 건강한 사랑은 다시 말하지만 깊은 성찰과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사는 방식으로는 나는 타인의 삶을 위해 이용되거나 타인을 이용하거나 둘 중 하나로 살게 되고 알고 보면 이것은 반대말 같지만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정말 사랑하는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없어서 외롭고 힘들더라도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fair한 상황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남을 도우면서 자신이 성숙한 사람이라고(흔히는 이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긴다. 남을 도우면서 사는 것은 실제로 그를 의지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위해서 일단 나 자신부터 균형있게 챙겨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주인되시어 우리 안에 오시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이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사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께서 주인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가장 심각하다. 이렇게 보면 고독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죄로 말미암은 고통의 단면이요, 반대편으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굳게 서 있는 축복이다. 얼굴을 덮고 있는 수건을 벗을 때 우리는 굳게 서서 한걸음씩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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