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가난해야 하고 영적으로도 가난해야 한다
- 엄태우 목사
- 5월 26일
- 3분 분량
아무리 여러 모양으로 포장을 하고 감추려고 해도 가난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 순간부터 우리의 솔직한 속내가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가난을 악으로 본다. 그 강력한 증거는 건강한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가난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만일 스스로 가난을 추구한다면 속이고 있거나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병든 것이다.
물론 청빈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누구도 가난한 사람을 주목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청빈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모종의 영향력을 주고 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이라는 컨텐츠로 가난하지 않게 사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전체주의든 누구도 자신이 가난한 편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더 끔찍한 것은 이런 자연스러운? 속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난한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성경말씀도 내가 남을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나도 헤아림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타인에 대해서 말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 내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그 생각의 1차 적용대상은 나 자신이다.
가난을 나도 모르게 ‘악’으로 세뇌받고 사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은 가난한 이웃에 대해서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매우 끔찍한 생각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도 이런 말이 매우 생소하다. 심지어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느낀다. 성경은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흑암에 갇혀 사는 인생의 결과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법과 권면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돌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의 대표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가난하셨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증거된다고 예언하셨다. 성경에 예수님을 영접한 부자들이 몇몇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정도이다. 성경 말씀은 이 둘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한다. 첫번째로 이 둘은 물질적으로 부자였지만 그것에 어떤 가치를 갖기는 커녕 오히려 환멸을 느끼는 상태였다. 두번째로 그 지위와 물질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믿음을 감추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고, 믿음이 있더라도 그 물질 때문에 매우 위태롭다.
우리는 가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을 일단 내려 놓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난이 두렵고 슬프고 불편함을 넘어서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이나 우리 아이들만큼은 가난하게 살지 말게 해야겠다는 순진한 노력은 거칠고 사나운 현실에 대해 아무 대안이 되지 못한다. 역사를 보면 가난의 문제는 확률 싸움이다. 내가 가난하지 않은 퍼센티지에 드는 것이 흑암 세상에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다수는 가난의 퍼센티지에 있으며 다수에 비해 매우 적은 소수가 하이어라키에서 상위권을 차지한다.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을 보면 그 상위권 페센티지는 이제 1%~5% 정도로 더 줄어든다고 하니 절망적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지 가난이 복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은 그들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물질의 문제에 약하다.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필자가 경험한 바, 현재 시점보다 물질이 더 많아졌다고 신앙이 좋아진 경우는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러 모양으로 돌려 말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지금보다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것을 기복주의라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사람들 또한 가난의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성경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하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가난해야 한다는 말은 소유라는 개념으로 얼룩진 흑암의 물질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라고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이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나님은 물으신다. 우리에게 반사신경 같이 익숙한 ‘나의 것’이라는 이 아름다운 말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 나의 것은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겉으로 보면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흑암의 매매정신을 반영하는 ‘내돈내산’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는 ‘실제로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은 덫과 같이 위험하게 들릴 것이다.
실제로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이 가난이 덕이거나 가난하면 믿음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영적으로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이 뒷받침한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 것은 그 가난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천국에 들어가기가 부자보다는 매우 쉽기 때문이다.
물질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은 우리가 청지기(廳지기)가 되는 것이다. 지기는 순우리말이고 ‘청廳’만 한자인 것이 흥미롭다. 잘 듣는 사람이 청지기이다. 성경은 교회가 된 사람들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교회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청지기가 되어 사는 것이다. 청지기에게는 ‘나의 것’이 없다. 모두 ‘주인의 것’이고 이 땅에서 주인의 것을 맡아 충성스럽게 관리할 때 더 큰 것으로 맡겨주지 않겠느냐고 주님은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