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 박인미
- 5월 19일
- 1분 분량
2008년,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프리랜서로 독립하기란 쉽지 않았다. 목사님께서는 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우며 그림을 병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들어가게 된 곳이 CLC라는 기독교 출판사였다.
업계에서는 출판디자인의 사관학교라 불리던 곳이었지만, 유명한 회사도 아니었고 근무 환경도 매우 열악했다. 그래서 속으로는 ‘딱 한 달만 다니고 그만두자’ 생각하며 입사했다.
그런데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내게 북디자인은 너무나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일하며 100권이 넘는 책을 만들었다.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에 퇴근 후에도 피곤한 줄 모르고 출판협회에서 진행하는 북디자인 수업을 들으러 갔다. 저녁마다 3시간씩 수업을 들으며 책 만드는 법을 배웠다.
책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글자들은 단순히 배치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원고지의 질서 위에 세워진 세계다. 기준은 한 글자의 크기다.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격(자간), 글줄 사이의 여백(행간), 페이지의 여백, 한 줄에 들어갈 글자 수, 가장 읽기 좋은 줄 수, 한 판면에 담기는 전체 글자 수까지—북디자인은 모든 요소를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계산하며 완성된다. 수학적이면서도 동시에 예술적인 작업이다. 단 1mm만 어긋나도 전체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
그 한 글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북디자인은 내게 제자도의 흔적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권의 책처럼 써 내려가고 계신다. 어린 시절 서점 주인을 꿈꾸었던 마음, 세계문학에 빠져 지내던 중고등학교 시절, 정확함을 요구하던 제도 수업을 좋아했던 시간들, 그리고 말씀을 표현하기에는 디자인만으로 한계를 느껴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게 된 과정까지. 북디자인은 내게 제자도의 흔적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시편을 그림책으로 내고 싶다는 내 소망을 따라, 표지부터 내지까지, 한 페이지의 소수점 두 자리까지 계산하는 북디자인처럼 정확하게 나를 훈련하고 계셨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라디아서 6장 17절